발자1취/대학생활

지난 7년을 회고하며 (21살. 군인)

미칠왕 2023. 3. 6. 08:44

1월.
가족들과 동유럽으로 여행을 떠나왔다. 당시를 생각하면 아버지가 큰 맘을 먹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오스트리아를 시작으로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등지를 여행했다. 마지막 밤을 체코에서 보냈다. 그때 가족끼리 상당히 재미는 있었지만, 1개월 후에 찾아올 '입대'가 내 마음을 썩 즐겁지는 못하게 만들었다.

17년 1월, 가족여행.

2월.
내 입대 예정일은 2월 14일이었다. 하지만 빙벽등반을 산악부에서 갈 사람을 모집한다길래, 선오와 함께 호기롭게 빙벽에 도전하기로 했다. 그 당시가 입대 5일전이었다. 입대 5일 전에 선오를 제외한 다른 모르는 사람들과 한 방에서 술을 먹자니, 마음이 심란해지기는 했다. 그래도 중학교때 열심히 해 온 Call of duty: modern warfare 2에서 본 빙벽등반을 실제로 한다니, 감회가 새로웠고 재미있었다. 부실의 오래된 클램폰과 바일을 빌려 1박 2일로 다녀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오가 찍어준 사진. 17년 2월 원주 판대에서.

드디어(?) 입대 날이 다가왔다. 나는 뭔가 설레기도 하고, 긴장이 되기도 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생각에 즐겁기도 했다. 아버지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운전만 하시면 자신이 나온 부대인 맹호부대의 군가와 장갑병가(?) 를 부르셨기 때문에, 나도 20대 초반에 멋진 군생활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줄곧 해 왔다. 나는 활동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일에 관심이 많아 특전사 지원도 실제로 생각했다. 그러나 부사관 지원시 4년여간 복무를 해야 한다는 점이 발목을 잡았고, 나는 타협점으로 육군에서도 강하다고 이름난, 특공병에 지원을 했다. 하는 일은 특전사와 비슷하지만,  일반 병과 같은 복무기간만 채우면 전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지원했다. 해병 수색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고1때 빠진 어께가 습관성 탈골로 진행될 우려와, 어께탈골에 수영이 매우 쥐약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단념했다.

아무튼 나는 발렌타인데이인 2월 14일에, 37사단 신병교육대에 입소를 했다. 입소식에는 부모님 차를 타고  오셨다.  입소식 때부터 6주차까지, 내 일기장에 그림과 함께 상세히 그 상황을 기록해 놓았지만, 지금은 집에 있어 어쩔 수 없이 이 글에 쓸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동기들끼리 매우 친하게 지냈고, 몇몇 친구들끼리는 지금도 자주 연락한다.


37사단 훈련소 동기들. 부산친구 지원이, 배우 하는 주석이형, 덩치 좋은 상민이형하고는 간간히 연락한다.

3월.

나는 목소리가 우렁차다는 이유로 중대장 훈련병을 맡았다. 내가 하는 역할은 훈련병 총원 전파, 우리 기수 대표 점호 보고 등등이었다. 훈련간 한 사람이 감기에 걸리면 감기가 유행병처럼 돌아, 나는 항상 목이 잠긴채로 구령을넣어야 했다. 그래도 밥도 많이 먹고, 건강히 잘 퇴소했다. 퇴소식때에는 군생활 다 끝난 줄 알았다. 그러나 시작은 이제부터였다!

나는 추첨에서 203 특공과 201 특공여단 두 군데로 배치되는 경우의 수밖에 없었다. 조교분들이 나를 스카웃(?) 하려고도 했지만, 나는 이미 특공병으로 지원했기 때문에 그런 경로로는 갈 수 없었고, 내가 원하지도 않았다.

나는 경상북도 경산시에 소재한 201특공여단으로 배정되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SRT라는 것을 타봤다. 알동기인 진성이, 찬영이와 주호를 거기에서 만났다. 우리는 한마음 대대인 1대대로 배정되었고, 김성춘 대대장님이 자리해 계셨다. 우리는 군기가 바짝 든 채로 경례를 드렸다. 과연 포스가 남달랐다. 특전사에서 소대장을 하셔서 그런지 매우 첫인상이 인상깊었다. 우리에게 믹스커피를 대접하시며 잘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셨다. 당연히 그렇다고 했다.

201 특공여단의 부대마크.


나는 3중대 특공병으로 배정되었다. 그때 박기홍 중사님을 처음 뵈었다. 지금 생각하면 강력한 '짱구'같은 첫 인상이었다. 강한 인상에 압도당했다. 알고보면 친근한 분이셨다. 당시 육사출신이신 김태진 소대장님도 같이 나를 반겨주셨다. 나는 중대 사람들이 신병이 왔다고 하여 보러 올때마다 정신없이 경례를 했고, 계속 질문이 쏟아졌다. 박기홍 중사님은 내 첫인상이 일단 '땀냄새가 오지게 난다' 고 하셨다. 그도 그럴것이 두터운 복장으로 열차 에서와 주변에서 계속 대기했기 때문이다.  

우리 소대는 3소대로, 당시에는 모두 내 위였다. 소대장님은 김태진 당시 중위님이셨고, 부소대장은 박기홍 중사님, 통신담당관은 한상문 당시 하사님, 지원담당관(?)은 서재현 당시 하사님이셨다. 김태진 소대장님은 6월, 한창 유격을 할 때 진급하신 후 여단 본부에 참모로 가셨다. 병은 2주 후에 전역하실 김재호 병장님, 조해석 상병님, 1중대 김종민 일병님, 당시 의무대에 가 계셨던 김대규 일병님, 당시 선임이었던 승민이, 엄유빈 일병님, 나를 계속 멋지다고 칭찬해주신 정찬주 일병님, 그리고 1월에 먼저 온 환이가 있었다.

다른 소대 같은 중대인 사람들은  행보관이셨던 박봉은 상샤님(항상 베드민턴 라켓을 들고 다니셨다), 707에서 오신 홍종훈 당시 하사님, 이번에 결혼하시는 김상규 당시 하사님, 박주현 중사님이 있었다. 박주현중사님은 현재 러닝화를 리뷰하시며 달리기를 즐겨하시는 것 같다. 중대장님은 당시 2주 후에 바뀌시기는 했지만, 사회에서 내가 산을 자주 다녔다는 말을 들으시고 안심하셨다. 나는 곧 전역하실 김재호 병장님의 총기를 물려받아, K201사수가 되었다.

우리부대에서 특기할 점은 바로 거의 전 장병이 특급전사였다. 나도 체력은 자신 있었지만 우리 부대 기준으로는 1급 '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우리 부대에는 특급전사에서 한 등급 더 높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황금독수리' 칭호였다.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특급전사에 더해 8m외줄을 발의 도움 없이 오르내릴 수 있어야 했다. 대대장님은 45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가뿐이 성공하심을 보고, 정말 경탄을 금치 못했다.

특급전사와는 달리 황독 패치는 그래도 희귀했다. 선임들의 그 황금색 패치가 너무 가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등근육을 길러야 했다. 찬영이를 비롯한 운동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주말에 파라다이스에서 따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다. 트레이너를 준비하는 찬영이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다른 중대 이동민상병님은 아예 사회에서 보디빌딩을 하셨다. 그래서 근력운동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4중대 노대석 일병님은 마라톤 선수생활을 하셨다. 3km를 9분대에 주파하시는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그래서 달리기 방법도 그때 도움을 얻었다.
지금 생각하면 모두 정말 체력적으로는 하늘을 찔렀던 부대였다. 만일 전쟁이 벌어지더라도 나는 동료 부대원들을 전부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나온 부대가 너무 자랑스럽다. 지금은 신속대응여단으로 이름이 바뀌기는 했지만, 201특공여단에서의 기억은 내 인생관을 바꿔나갔다.    

4월.
특공부대 용사라면 입소 후 다시 특공신병 집체교육이라는 것을 받아야 했고, 우리는 곧 여단 본부 주변에서 2주간 집체교육을 받았다. 그때 당시의 특공신병교육대장님은 김성운 상사님이셨다. 교육대장님은 화끈한 성격이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만 제대로 하면 자유를 주셨다.

그때 군대식 특공무술과 패스트로프, 레펠을 배웠다. 1학년 산악부 때에 높은 곳에 일가견이 생겼기 때문에, 나는 그리 무서워하지 않았다. 퇴소날, 여단장이셨던 김용욱 준장님(공교롭게 1중대 동기인 용욱이와 성함이 같았다.) 앞에서 특공무술 시범을 보였다. 내가 멀리구르기를 마무리지으며 끝냈다.

특공신병 집체교육 당시 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 사진은 일병때 후배 기수들을 위해 조교 파견을 갔을 때 찍힌 사진이다. 시범을 두번 한 셈이다.

부대에 복귀하니 외출을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부모님께 오실 수 있느냐고 여쭤봤다. 대구 롯데백화점에서 아버지께 최우수 수료로 4박 5일 포상휴가증을 자랑했다.

상장과 포상휴가증.

5월.
5월은 폐지된 부대인 우리의 자매 부대였던 경상남도 사천에 위치한 205 특공여단 파견근무를 갔다. 부대는 해체되었지만 그 건물은 온전했기에, 우리 여단의 3대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그때 특공신병 집체교육때 친해진 친구들을 본 기억이 있다.
탄약고 근무를 많이 들어간 기억이 난다. 조해석 일병님의 사회 시절 이야기, 엄유빈 일병의 넋두리 등을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근무 끝 10분전이 제일 시간이 안갔다.

근무를 설 때에면 20살때와는 달리 시간이 빨리 갔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사람이란 어떻게 보면 참 간사한 것 같다. 그 당시에는 행복한 순간에 이런 자잘한 시간을 저장해 두었다가 사용하면 어떨까 하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5월 말에는 안강으로 k-201유탄 사격훈련을 갔다. 모처럼만에 부대 외출(?) 이라 내심 설렜다. 어쨌거나 부대 밖으로 나가는 것이니까. 처음 쏴본 유탄의 소감은 매우 이색적이었다. 정말 게임에서처럼 "수통~" 소리를 내며 발사가 되었다. 폭발음은 매우 커서 깜짝 놀랐다.

6월
6월 초에 드디어 신병휴가를 나왔다. 아마 그때가 입대 110일 때인가였다. 나는 휴가일지에 매우 뺴곡하게 시간단위로 하고싶은 일들을 정리했다. 일단 학교에 들르고, 집에도 다녀와서 짱이 산책도 시키고, 오랜만에 태백산에도 가고싶었다. 마침 하성이와 지화, 현진이가 학교에 있어서 만났다.  여전히 불난떡볶이를 자주 갔다. 이날도 분식이었는데 어디였는지는 까먹었다.

현진이, 지화 더비(?)와. 신병휴가기간.


휴가 복귀 이후에는 유격이었다. 유격, 말만 들어도 오금이 떨린다는 유격, 어떤 모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유격의 시작은 일단 행군이었다. 소위 입소행군이라 불리우는 그 오르막길은, 체력이 좋다고 자부한 나로서도 힘들었다. 날은 무지하게 맑았다. 아니 뙤약볕이 내리쬐어 매우 더웠다.

18년 화산유격장 입소행군. 17년은 일병때라 그림 그릴 시간이 없었다.

입소 이후에는 대대장님이 유격대대장님이 되는 식(?)을 거행했고, 우리는 짐을 바로 푼 뒤  CS복장으로 갈아입고 그 말로만 듣던 PT체조를 했다. 솔직히 막 엄청 힘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운동을 할때 미소를 짓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것이 교관님 눈에 밟혀 나는 열외되어 팔굽혀펴기를 남들보다 많이 하게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오히려 좋아' 마인드였다.

18년 PT체조. 다들 훈련이 끝나면 연신 담배를 흡연했다.


화산유격장은 경상북도 군위군에 위치한, 경치가 멋진 곳이었다. 민간 시설이었다면 휴양지이자 클라이머들의 단피치 훈련장으로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어느 곳에서 듣기를, 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헬기 순시를 돌다가 '이 지역은 유격장으로 안성맞춤이군' 이라고 해서 바로 만들어진 유격장이 바로 화산유격장이라는 카더라 통신(?)이 있었다.

아무튼, 우리 부대는 특공부대였기 때문에 유격훈련도 4주간 했다. 1주는 PT, 2주차는 특전사도 하는 산악전문유격, 3주차는 독도법 숙달, 4주차는 우리의 주 임무였던 탐색격멸작전 훈련을 했다.

산악극복훈련은 매우 재미있었다. 특히 R2는 암벽 하강훈련이었기 때문에 재밌게 할 수 있었다.

R2 하강장면, 역시 2018년때이다.

김태진 대위님과 3주차 주말에는 산딸기를 따러 구보 루트 주변 산기슭으로 향했다. 사회에 있을 때 아버지와 버섯 및 먹는 풀을 많이 캐고 다녔다고 해서 나를 데리고 오셨다. 4주차까지 유격생활을 마무리하고, 우리부대는 귀소행군을 했다. 중간 대휴식때 먹는 육개장 맛은 잊지 못한다. 행군 끝에 대대장님이 막걸리를 전 장병마다 한잔씩 나눠주셨다. 매우 맛있었다.

7월.
이날은 대대 전체가 포항 해변으로 전투수영훈련에 들어갔다. 첫날의 포항 바다는 잔잔했다. 엄창용중사님이 당시 스쿠바 교육을 받고 오셨기 때문에, 우리 전투수영의 교관이 되셨다. 우리는 교관님의 통제 하에 모래사장에서 전투수영 훈련을 실시했다. 원해에는 나가지 않았다. 대대장님이 안전을 고려하여 해안가 주변으로 전투수영 실습을 할 것을 지시했다.
대대장님은 병사들의 복지에 또 관심이 많으셨다. 우리가 방풍림에서 숙영지를 편성하고 있을 때 즈음 대대장님 직권으로 야간에 빔프로젝트로 영화를 볼 수 있게끔 하셨다. 너무 생경한 경험이었다. 마치 사회에서 글램핑을 하는 것 만 같았다. 지금 미화되는 측면이 없지 않지만, 색다른 경험이었다.
나는 한상문 당시 하사님과 텐트를 같이 사용했다. 첫날에는 이상이 없었으나, 우리 방풍림 지역에 비가 오고, 그 빗물이 텐트를 적실때 우리는 자다 일어나 물을 치워야 했다. 축축한 상태에서 쪽잠을 잤다. 그러나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생각으로 벼텼다.

당시 전술텐트와 비와 사투 흔적. 수성펜이 물에 젖은 흔적이 보인다.


1주간의 전투수영이 끝나고, 대대종합전술훈련에 들어갔다. 나는 부소대장님과 같이 자리했는데, 식사추진부터 탐색격멸작전까지 어느 하나 힘든 것이 없었다. 특히 무학산 정상 인근에서 진행되는 탐색격멸작전 훈련은 진땀을 빼게 했다. 모두가 고생했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내가 종합 전술훈련 표창장을 받았다. 중대원들을 대신해 내가 대신 받았다고 생각하고, 미안해했다.

8월.
8월은 또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바로 홍종훈 하사님과 사회에서 마르고 닳도록 들은 707에서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당시 군에서는 각 특수목적부대(특수목적부대라 함은 해병 수색대, 육군 수색대, 헌병 특임대, 특공대 등을 말했다.)의 병으로 하여금 대테처 초동조치 훈련을 시켜, 각 부대에 대테러 능력을 고양하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차출되어 707 대대(당시에는 대대였다)의 대테러 훈련교장인 47교장에서 훈련을 받았다. 먼저 다녀온 정찬주 상병님의 counter terror 패치가 그렇게 멋지게 보였다.

정동주 중사님 지도 하에 우리여단 차출멤버들은 아침점호가 끝나고 707 자체만의 체력검정을 위해 운동을 실시했다. 정말 정자세로 준비했다. 입소 당일날에는 모든 부대에서 내로라 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특히 해병 수색대의 베레모가 인상깊었다. 물어보니 포항쪽에서 왔다고 했다.

무서운 검은색 선글라스의 교관님들이 체력검정을 감독하셨다. 요원분들중 여성 교관님들도 여럿 계셨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707 요원은 국정원 요원들과 비슷하게 호텔리어, 간호사 등으로 위장하여 잠복근무를 하는 임무도 부여받기 때문에 UDT와 달리 여성 요원분들도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47교장은 마치 지하철 역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테러는 도심 수도권 주요 교통시설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47교장의 뜀걸음 코스는 매우, 매우 가팔랐다. 숨이 너무 찼다. 그래도 상위권으로 들어왔다. 간신히 들어온 뒤 뒤를 돌아보니, 30%의 인원이 교육을 받아보지도 못하고 퇴소를 했다. 다행히 우리 부대원들은 모두 입소했다.

'행동으로 논리를 대변하고 결과로서 과정을 입증한다'

707대대의 캐치프레이즈였다. 마라톤을 하다 오신 교관님이 초기 집체교육을 맏으셨다. 나는 6월 유격체조와는 레벨이 다른 강도의 체력단련을 받게 되었다. 온몸이 후들거리고 눈물이 글썽거리게 되는 고통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체력단련을 받은 후, 우리는 서로의 부대 경례구호가 다른 점을 감안, 교관님이 '단결'로 통일하라고 하여 그렇게 했다. 뭔가 기분이 으쓱해졌다.

사격훈련에 앞써 우리는 기본적인 CQB훈련을 받았다. 건물 내 침투는 은밀하고 정확해야 하기 때문에, 그의 기초인 기본 수색자세로 뺑뺑이를 돌렸다.

체육교사 생활을 하다가 염증을 느껴 707요원이 되신 장준영 교관님은 사격 전문이었다.

교관님이 퇴소때 나눠주신 명함을 아직 가지고 다닌다. '초심불망' 글자와 함께 안중근의사의 단지 손바닥 자국이 눈에 띄었다. 해당 교관님은 말소리가 차분한 대신, 실전적인 훈련을 가르쳐 주셨다. 특히 전술사격을 전수받은 것은 너무 좋았다.

지금쯤 각 부대에는 이동간 전술사격이 보편화되고 있다고 하는데, 군의 발전에 있어 이것은 분명 좋은 변화다. 교관님은 기존 부대의 사격 프로토콜을 실전성있게 최대한 간소화하셨고, 몇몇 꿀팁도 알려주셨다. 이때 사격을 정말 많이 했다.

교관님과 사격. 2017년 8월.

아마 집에 있을 것인데, 한 교관님은 못쓰게 된 탄두를 기념으로 가지라고 나를 주셨다.

숙소에서는 각기 다른 군의 병사들끼리 한 생활관을 사용했다. 우리 생활관은 5명이었는데, 두명은 해군 SDT였고, 한명은 육군, 그리고 한명은 서울대 공군 SDT였다. 공군 SDT의 경우 야간 근무를 서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심 부러웠다. 주말에는 우리 부대원들끼리 '원터치' 를 하다가 마침 나온 해병대 특수수색대 친구들과 족구시합을 했다. 무뚝뚝한 인상에 자기네 해병들끼리만 논다는 이미지가 우리들 사이에 있었지만, 그 이후로 그런 인식은 눈녹듯 사라졌다.

2주차에는 47교장에 마련된 보잉 747기로 실제 비행기 하이재킹 상황을 가정하는 훈련에 돌입했다. 내가 테러범 역할을 맡았다. 같이 테러범 역할을 하는 교관님의 연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 교관님은 어떤 경로에서인지 북한말이 매우 능숙했다. 우리 초동조치부대의 주 역할은 테러범의 반경 최내곽선에 폴리스라인을 설치하고, 전문 침투조가 투입될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유사시 침투도 할 수 있게끔 훈련도 받았다.
이 시간들은 정말 어디서 돈을 준다고 해도 하지 못할 값진 경험임에 틀림없다.

17-3기 대테러초동조치 교육과정 수료 후.



9월.
동기들과 외박을 나왔는데 왠일인지 고향 고등학교 친구들을 여럿 만났다. 심지어 경찰학교에서 수료가 끝난, 의경인 정수와도 만났다. 너무 신기해서 사진을 찍었다. 각자의 위치에서 소임을 다하는 모습에 감회가 새로웠다.

9월 동성로에서 정수와.

10월.
드디어 두번째 휴가였다. 모아놓은 포상휴가 등으로 10일간 나왔던 것 같다. 매우 좋았다. 한가롭게 집 뒷산 달리기를 하기도 헀다. 이때 처음 트레일러닝에 대해 알게되었다. 학교에 있는 요셉이와 재윤이, 상택이, 동휘, 용석이, 해수도 보고, 집주변에서는 형석이 경석이, 창현이, 동원이도 봤다. 서울시립미술관도 구경을 갔다. 혼자 갔는데 재미있었다. 어쩌다보니 홀로 하루 전체를 서울구경 했지만, 사회에서는 굴러도 좋다는 말이 있듯이, 계속 들뜬 기분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홀로 애슐리 퀸을 먹으러 간 것 같다. 춘천에서는 의경이 된 강현이와 학교 다니고 있는 현범이를 봤다. 지금은 뭐하고 지내는지 잘 모르겠다. 잘 살고 있지 않을까?

요셉이, 재윤이와.



11월
이때에는 부대가 바빴다. 모 육군 전방 사단에서 사격훈련 중 2km밖에서 작업을 마치고 귀대하고 있던 한 일병이 도비탄을 막고 사망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상식적으로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 도비탄이 머리를 관통했다는 이야기는 잘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벌어졌고, 전군은 사격장을 다시 재정비하도록 지시를 받았다. 푸닥거리가 시작된 것이었다. 우리 부대에 유격기간 중 새로 부임받은 소대장님은, 2주가 넘는 그야말로 '삽질'에, 이러려고 특전 병과에 지원한 것이 아니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리어카를 나르셨다. 우리는 도비탄의 원인이 될 돌을 옮기고, 또 옮겼다. 얼마쯤 옮겼을까, 사격장의 지형이 달라졌다.
  
한창 푸닥거리(?) 가 끝나고, 사격훈련을 진행한 뒤 동기들끼리 외박을 나갔다. 지금에야 규정 위반이지만 우리는 동기였던 우현이의 집인 천안으로 '점프'를 했다. 우현이 집에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우리는 '작전'을 진행했다. 초밥뷔페와 노래방에서 우리는 꿀맛같은 주말을 보냈다.

'작전'에 성공한 동기들과.

이 즈음 대대 체력평가에서 나는 드디어 '황금독수리' 칭호를 얻는 데에 성공했다. 너무 자랑스러워서 그 패치를 군생활 내내 패용하고 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12월.
다른 것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이것만은 기억한다. 대대장님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셨기 때문인지, 성탄절 즈음을 기해 경연대회를 열어 부대원들에게 포상을 줄 생각이었다. 말이 경연대회지 사실상 병사들의 재롱잔치였다. 우리 3중대는 체면은 잠시 구기더라도 전체 포상휴가를 꿈꾸며 모두 큰 결단을 단행했다. 그것은 트와이스의 'likey' 반주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이었다. 정찬주 상병님의 아이디어였고, 우리는 포상에 눈이 멀어 체면을 팔아넘겼다. 1주간 맹훈련에 돌입했다.

대대장님이 경연대회 당일날 보시고 흡족해 하시며 우리에게 포상을 내리셨다. 그런데 쪼잔하게 참여자 전원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1박 2일짜리 포상을 '단 하나' 만 내리셨다. 평소같으면 그러실 분이 아니었는데, 분명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우리는 협의 하에 최 후임이었던 심우현 이병에게 그 포상휴가권을 주기로 했다. 그런 앙증맞은(?) 해프닝이 있었다.

다음 연재에는 그 무시무시하던 THAAD 경계지원작전 투입 과정과, 유격훈련, 트와이스 만난 썰, 소대 전체가 해운대로 여행을 간 썰, 그리고 대망의 전역을 풀 예정이다. 그것이 언제가 될 지는 며느리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