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년을 회고하며(22살, 군인, 2018년)
2017년, 22살
1월
상병 진급, 사드배치
1월부터 나는 상병이 되었다. 말로만 듣던 상병이라니, 벌써 절반이나 흘렀단 말인가? 그래도 아직 거의 1년이라는 시간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엄청 즐겁고 그러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때 생각하면 일병때 외박이나 휴가를 나오는 것보다 상병때 상병 마크를 달고 나오는 것에 대한 마음이 남달랐다. 사실 좀 들뜬 것은 맞다. 이제는 후임이 선임보다 많아졌다. 내 소대만 하더라도 석진이, 환우, 효민이가 후임이었다. 내가 볼 때에는 세명 다 열심히 하고 모난 부분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12월 말경, 우리는 그 당시 한창 문제가 되었던 THAAD 배치로 인해 불안정한 상태에서, 사드 배치 주둔기지인 성주기지 방호작전에 투입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 3중대는 본 대대가 들어오기 전 선발대 역할로서, 남들보다 1~2주 먼저 경계작전에 투입되었다. 박기홍중사님이 말씀하시기를, 특전사에 있을 때 파병과 매우 유사하다고 말씀하셨다. 레바논인가를 파병가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주요 임무가 관련 기지 방호작전이었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았다. 송민기 소대장님은 3소대원들을 잘 챙겨주셨다.
우리는 평소 패스트로프 강하훈련을 하던 수리온을 타고 성주기지로 향했다. 헬기 창밖에 비치는 겨울 산들은 절경이었다. 주간에 우리는 예전 성주 골프장이었던 장소 한복판에 착륙했다. 착륙 후 대대장님은 기 주둔하고 있던 50사단 기동대와 이야기를 나누고 인수인계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50사 기동대 중에 대학교 산악부에서 19년도에 알게 된 병민이가 해당 기지에서 나처럼 경계작전을 했다는 것을 들었다. 우연의 일치가 정말 신기했다.
짐을 기지 클럽하우스에서 풀고 우리도 인수인계를 받았다. 우리의 주된 임무는 성주 기지 전체를 둘러싼 철조망을 주기적으로 순찰하며 경계근무를 서는 것이었다. 미군 또한 같이 클럽하우스를 썼다. 우리가 관할하는 구역 중 기지를 둘러 5개의 텐트가 있었으며, 4인 1개조로 한텐트로 근무가 편성되는 식이었다. 순찰은 인근 철조망을 1시간 30분에 한번씩 다녀오는 것으로 기억한다.
1텐트는 탁트인 대신 쥐소리가 많이 났고, 2텐트는 산속 평지에 있어 접근성도 좋고 고요했다. 3텐트는 골프장에서 가장 넓은 부분에 있었는데, 골프장으로 운영되고 있을 당시에는 아마 캐디? 및 손님들의 휴식처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3텐트를 배정받는다는 것은 온기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4텐트는 산능선에 있었다. 정상 부근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투입부터 힘이 들었다. 순찰로는 한번은 능선, 한번은 오르막길이었는데, 쉽지는 않았던 것 같다. 4텐트 맞은편에는 달마봉이라고 하여 성주기지가 한눈에 보이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시위대가 우리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한번은 달마봉에서 스님이 꽹과리를 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5텐트는 조금 후미진 곳에 있던 곳으로 기억한다. 근처에 나무가 많아 어두웠고, 우리 외에 다른 인원이 순찰을 돌 때에 잘 보기 어려운 위치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5년 전 일이지만, 순찰을 돌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들이 생각난다. 그곳에서 타군 군가를 많이 외웠던 것 같고, 중대장님의 스펙타클한 중위 시절 썰을 들을 수 있었다.


클럽하우스 내부의 시설은, 이전에 골프장이어서 그런지 훌륭했다. 우리는 단지 객실이 아닌 간이 침상에 침낭을 깔고 잤다. 무엇보다도 성주기지에서는 부대간의 교류라는 명목으로 주둔 미군부대의 병영식을 먹어볼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올 때 즈음에는 전 주둔 한국군 부대중 일부가 미군 병영식이 오픈되어 있지 않을 때 마음대로 취식했다는 이유로 폐쇄된 상태였다. 그래도 기지에서 돈을 주고 라면을 사먹을 수 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야간근무에 본격적으로 투입되었을 때 또한 우리는 텐트 내에 설치된 라디에이터에서 잠시나마 몸을녹이며 빅팜따위를 데워먹었다. 나는 평소 밤에 야식을 먹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주침야활이다보니 밤에 무엇인가를 먹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3월 주간 근무가 있기 전까지는 밤에 식사를 제공하지 않았다. 야간에 먹는 식사는 순전히 우리 돈으로 마련해야 했다.
주간근무로 바뀌었을 때 점심을 먹을 수 있게 되어 더 좋았다. 아무튼, 야간근무는 오래 유지하기 어려운 시간대임은 확실하다. 4인 1개조로 텐트에 투입되는데, 2명은 순찰조를, 한명은 텐트 주변 대공 감시를, 그리고 나머지 한명은 텐트 내 대기를 했다. 지금 와서 하는 이야기이지만, 대공감시는 정말 추웠고, 다음에 간부님이 예정되어 있을 때에는 대부분의 경우 내가 더 서야 했다. 한번은 1.5배나 더 오랜 시간 밖에 서 있어, 발이 얼어붙은 적이 있다. 4텐트의 매서운 바람이 아직도 느껴진다.

야간근무 중에 PVS -7 이나 04K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육안으로 보이지 않던 별까지 정말 끝도없이 보인다. 야간감시장비가 거추장스럽고 헬멧 앞에 장착해야 했기 때문에 정말 무거웠지만, 이런 시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대공감시를 하며 간간히 밤하늘의 별을 세며, 내 군생활에 대한 생각과 진로 등에 대한 생각을 했다. 이 당시의 시점이 가장 내가 사색할 수 있는 시기였던 것 같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복학해서 미디어커뮤니케이션, 즉 신방과를 복수전공할까, 화공과를 가버릴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운동하는 변호사'라는 진로를 생각해 내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 진로란, 내 직업의식을 갖고 영리를 추구하기 위한 수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정체성을 어떻게 가꾸어나가느냐도 포함하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주한미군의 사드배치로 인한 한중 무역이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무역과 관련한 내 진로를 잡을 수 있었다. 그때의 생각으로도 만일 플랜 A인 변호사로의 루트, 즉 로스쿨 진학에 실패하게 된다면 플랜 B로 무역과 관련한 일을 하기 위해 관련 학과를 복수전공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덕분에 내가 지금 미국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경계근무를 서며 내 미래에 도움이 되는 생각들을 많이 했다. 그러나 경계작전으로 외출 외박이 제한되었고, 휴가도 시위대를 피해 몰래 가야 했다. 폐쇄된 환경에 있다보니 부대원들이 한번씩 예민한 반응을 보일 때가 있었다.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서로간의 오해를 푸는 데에도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해당 경계작전 중 딱 한번 나간 기억이 나는데, 그때 기지 최외곽선에 의경들이 대거 배치된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야 기지 내만 감시하면 되지만, 의경들은 직접 시위대를 상대해야 한다는 것을 볼 때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2월 휴가를 나와서는 범주와 정훈이를 만났다. 범주는 당시 ROTC 에 입단하여 3학년을 앞두고 있는 상태였고, 정훈이는 그냥 태백에 있었다. 최근 설날에 정훈이를 만났었는데, 강원랜드에서 보안을 담당하고 있다고 했다. 범주는 전방에서 소대장 생활을 마치고 강릉에서 헤어디자이너 생활을 하고 있다. 강릉은 조만간, 미국에서 귀국하면 가봐야겠다.

눈이 펑펑 오는 날이면 4중대 행보관님이 직접 만들어주신 넉가래를 들고 1열 횡대로 집결해 눈을 불도저처럼 쓸었다. 성주기지도 전방 못지않게 눈이 정말 미칠듯이 쏟아졌다. 미군들은 무슨 잔디깎는 기계 같은 것으로 눈을 치웠다. 우리를 신기한듯 바라보는 눈치였다. 우리가 야간근무일때도 주간에 눈이 너무 쌓인다 싶으면 깨워서 제설작업에 투입되고는 했다.
눈 하면 생각나는 것은 내 왼쪽 어깨다. 효민이와 4텐트 순찰을 하던 날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노면이 미끄러워 주의해야 했고, 오르막길은 진창이었다.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 옆의 밧줄을 잡았으나, 어께는 반대쪽으로 뒤틀린 상태였다. 왼쪽 어께는 가뜩이나 예전의 탈골 경험 때문에 민감한 부위인데, 한번 더 부상을 입었다. 효민이는 매우 걱정스러워하며 나를 의무대까지 대려가 주었다.
의무장교는 내 어께를 보며, 일단은 '긴급조치' 로 파스를 붙여 주셨다. 그때 통증의 원인은 터무니 없게도 그냥 근육이 놀란 것이라 진단해 주셨다. 분명 팔이 빠졌고 그것을 이야기 했는데, 복귀 후 병원에 가 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나는 군의관이 그나마 전문가인 만큼 말을 믿어보기로 했고, 그것은 9월에 큰 부상으로 이어졌다.
한번은 우리가 재고처리를 담당한 적이 있다. 군에서 설날인가, 추석인가에 장병 복지차원에서 '투게더' 한통씩을 나누어준 적이 있었는데, 모종의 사유로 3월 즈음에 그 재고가 우리 대대로 떨어졌다. 한 사람당 4통씩 주었고, 아이스크림이었기 때문에 녹기 전에 먹어야 했다. 나를 포함한 몇명은 배탈이 나서 고생했다.

우리는 공병대의 유자 철조망을 까는 작업에도 투입되었다. 말이 특공병이지, 이 시기만큼은 정말 '특수 공병' 이었다. 유자는 철 가시가 있고 매우 무거웠다. 해당 유자는 이미 작년 사격장 정비를 할 때 본 적이 있다. 잘못하다간 다칠우려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대한 조심 조심 움직였다. 그래도 덕분에 혹한기 훈련은 하지 않았다. 군생활을 통틀어 유격은 2차례 연속으로 했지만, 나름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다.
가장 좋았던 것은 미군과 지하에 간이로 마련한 헬스장을 썼다는 것이다. 환우와 이동민 병장님, 찬영이가 매우 좋아했다. 연병장따위를 뛸 수 없으니 뜀걸음을 안해도 된다는 지침에 부대원들이 좋아하기는 했지만 나는 살짝 아쉬웠다. 그런데 미군의 런닝머신을 쓸 수 있어 매우 좋았다.
간이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비가 너무 좋았다. 우동혁중사님과 환우가 짝을 지어 운동하고, 덩치큰 미군들이 풀업을 하고 있었다. 운동을 하고 몸을 키우기에는 최적의 조건이라 생각했고, 근무가 끝나면 열심히 운동했다. 중대장님도 그때 벌크를 키우셨다. 나에게 프로틴바도 챙겨주셨는데, 그때가 제대로된 프로틴바를 먹은 첫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4월
우리는 4월 말에 드디어 성주기지에서 복귀하여 본 주둔지로 귀대했다. 우리는 선발대로 왔기 때문에, 다른 부대가 이후에 치누크로 귀대할 때에 3중대는 역시 수리온을 타고 귀대했다. 그때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후련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귀대한 이후 약 2주간은 별다른 중요 부대 행사가 없이 쉬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못간 정식 PX도 가고, 부대 내 노래방도 갔다.

5월
5월 초에는 고대하던 상병휴가를 썼다. 계획된 일정은 태백산 등산, 학교 축제 참여, 그리고 가족들과의 시간이었다. 태백산은 한창 신록이 우거질 5월이었기 때문에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문수봉에 갔는데 그렇게 고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오래 문수봉 정상에 머물며 그림을 그려나갔다.

군대 티비로만 보던 트와이스를 18년도 축제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1중대 제하가 정말 부러워했다. 친구들을 많이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계속 티비 화면으로만 본 사람을 직접 본다는 것은 감회가 남달랐다. 트와이스는 훈련소때 정훈장교가 교육 시작 전에 신곡이 나왔다며 노래를 틀어주셨는데, 그때 곡이 knock knock 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드 작전때에는 heart shaker가 나왔다. 뭔가 신기했다. 군 생활때 활력소가 되었기 때문에, 트와이스 노래는 전역하고 1년간 또 들어왔던 것 같다.
이때 낮에 준희를 만났다. 그때는 5급공채를 준비하는 반에 소속되어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제작년 마지막 연락이 닿았을 때에는 CPA를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찌되었든, 잘 살아남고 있지 않을까?
집에 돌아와서, 가족과 함께 삼척에 장미축제에 갔다. 평화로운 한때였다. 점심으로는 물회인가, 매운탕인가를 먹었는데, 아버지가 옛날에 일을 다니실 때 즐겨 드셨던 곳이라고 한다. 의정이는 잘 못먹어서 내가 대신 먹었다.

3월은 김충의 병장님, 김대규 병장님 4월은 김종민 병장님과 홍종훈 중사님, 5월은 이상민병장님이 전역한 것으로 기억난다. 이름을 날린 많은 부대원들이 전역을 하니, 나도 전역이 5개월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전에 유격이라는 빅 이벤트가 예정되어 있었다.


5월 말 ~ 6월초
유격이다. 작년과 같이 화산유격장에서 유격훈련을 했지만, 이번에는 3주였다. 솔직히 4주차까지 가는 것은 루즈해 지는 것 같기는 해서, 잘 변경되었다고 생각했다. 유격때의 컨텐츠는 그리 달라진 것이 없다. 단지 3주차에 소대단위로 실전적인 훈련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이때 사진을 남겼다. 3중대끼리, 그리고 동기들끼리. 작년에는 보안상의 이유 등등 때문에 부대에서는 사진 촬영에 인색했으나, 그래도 해당 년도에는 이런 사진들을 건질 수 있었다. 대대 동기들끼리 찍은 사진도 남겼다. 작년에 해 온 것이어서 그런지 익숙했다. 특히 슬랩 연습 암장이었던 R5도 감을 잡고 잘 할 수 있었다.



7월
7월에는 대대종합전술훈련을 했고, 최우수 소대 표창 등으로 소대원 전체가 1박 2일 특별휴가를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운이 좋게도 우리 3소대가 걸렸고, 중대장님은 언제 가고 싶냐는 질문을 하셨다. 나는 빨리 대답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여 7월 중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상의도 없이 내가 의견을 개진한 것은 그리 좋지 못한 생각이 아니었다. 한상문 중사님과 서재현 하사님이 7월에는 시간이 되지 않아 같이 못 나가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죄송스럽기도 하고 아쉬운 생각도 든다.
아무튼, 우리 소대원들은 부산이 고향인 환우의 인도 아래 풀코스? 로 부산을 즐겼다. 누가 봐도 군인 머리에 사복을 입으니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는 하지만, 해운대 해수욕장에 간다는 것이 정말 기분 좋았다. 사진을 많이 남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점심으로는 조개구이를 시켜 먹었다. 아마 송민기 소대장님이 사 주신 것으로 기억한다. 빠듯하실텐데 소대원들을 이렇게 챙기시는 것을 보면 정말 지금 생각해도 멋지신 분이신 것 같다. 저녁에는 광안리에서 광안대교를 앞에 두며 해물파전에 막걸리를 마셨다. 아마 2차로 맥주집을 갔던 기억이 나는데 이때 소대장님이 취하신 상태에서도 너희들이 소대원이어서 정말 좋았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난다. 신기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나는 다음날 아침 해장을 하기도 전에 부산에서 태백으로 몸을 실었다. 집에서는 큰집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다고 했고, 가마솥에는 옥수수가 있었다. 여느때처럼 맛있게 먹었다. 창고 밭일도 도와드리고, 점심으로는 어머니가 해 주신 쫄면도 먹었다. 쿨 시네마 페스티벌이라고 하여 오투리조트에서 한여름밤에 야외 영화 상영을 했었다. 가족끼리 다 모여 그곳에서 영화를 봤다.

다시 서울로 와서 일러스트레이션 페어 구경을 혼자 갔다. 그때는 정말 진지하게 그림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배낭을 메고 곳곳을 누볐던 기억이 난다. 마음에 드는 뱃지도 획득했다. 그리고 나는 설악산 대청봉을 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원래부터 산을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휴가를 1일가량 남겨두고 설악산을 종주해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확한 루트는 기억이 나진 않지만, 천불동 계곡 쪽으로 올라간 기억이 난다. 나는 점심 즈음에 출발을 했기 때문에 희운각 대피소에서 하루를 묵어야 했다. 이름 모를 사람들과 잠을 청하고, 물티슈로 간단한 세정을 한 뒤 새벽에 중청을 넘어 대청봉으로 향했다. 그때 사람이 조금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일출을 봤는데 매우 멋있었다.

8월
8월에 정확히 부대에서 어떤 일정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모아 놓았던 휴가를 계속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곧 전역예정인 우현이와 환이와 함께 천안 부근에서 술도 한잔 하고, 고향 친구들과 태백닭갈비를 먹기도 했다. 성진이, 경석이, 대영이, 현수, 성현이를 만났다.

9월
부대에서 여느때와 같이 체력단련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내 왼쪽 어께가 신경쓰이기는 했지만, 턱걸이때 데드행이라고 하여 축 늘어지는 자세를 취하지 않을 경우 괜찮을 것이라 판단하여 그냥 계속 운동을 했다. 3월때 이후로는 크게 아파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상은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나는 외줄을 타고 8m 지점에서 갑자기 어께가 빠졌다. 단말마의 비명소리와 함께 나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중대원들 전체가 걱정했고, 다시 접골이 되기는 했다. 그러나 통증은 예전의 약 4배쯤 되었다. 특히 기존에도 내 어께부상을 알고 계셨던 중대장님은 이제 정말 심각해졌다고 판단하여, 대구통합병원으로 갈 것을 이야기했다.

나는 다음날 즈음 박주현중사님의 차량에 탑승하여 군병원으로 갔다. 군의관은 왜 이제야 왔냐는 투로 말을 했다.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계속 빠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나는 진료를 마치고 아버지께 전화해 군 병원에서 수술을 하게 되었다고 통보했다. 아버지는 당장 병원에서 나와서 병가 내고 사제 병원에서 수술을 하자고 했다. 나는 군에서의 수술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님을 알고, 아버지가 하신 말씀을 따랐다. 참고로 군 병원에서 수술 권고를 받아 수술을 받으면 무료가 되지만, 민간 병원에서 따로 수술을 받을 경우 군에서 수술비를 일체 부담하지 않았다. 어찌보면 당연하지만, 그래도 군 복무중 부상인데, 가슴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의가사제대를 시켜야 한다는 중대장님의 농담반 진담 반 이야기에 나는 솔직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의가사제대가 뭔가 떳떳하지 못한 방법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의가사제대는 안된다고 말씀드렸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서울 날개병원에서 어께 탈골 수술을 받았다. 무슨 인체에 무해한 녹는 못 5방으로 어께를 고정시킨다는 내용을 의사선생님으로부터 들었다. 나는 잘 되겠거니 하고 수술대에 몸을 올렸다. 전신 마취 가스를 맡고 눈을 떠보니 어느새 입원실에 있었다. 내 왼쪽 어께 전체는 못 움직이도록 구조물이 자리해 있었고, 오른손에는 카테터가 꼽혀 있었다. 영락없는 윈터솔져였다. 병원식을 먹으며 3일을 있었다. 중간에 너무 좀이 쑤셔서, 병원 옥상에서 스쿼트를 했던 기억이 난다. 외가집, 고모네, 집에서 병문안을 왔다. 입원절차가 끝나고 나는 병가로 집에 며칠 있었다.

10월
나는 어께 보조기를 6주간 착용해야 했기 때문에, 부대에서 훈련 등은 하지 못했다. 대신 나는 밤낮으로 보일러를 돌렸다. 부대 지하 보일러실은 기계음만이 들리는 으슥한 공간이었다. 부상으로 어쩔 수 없이 보일러병을 해야 했던 선임들이 남기고간 HIM 이라는 부대 잡지가 있었다. 그것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 기억이 난다. 그때 초소근무에서 출동률을 채우지 못해서 중대원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한달간은 그렇게 살아온 것 같다.

환이가 전역했다. 나보다 1개월 먼저 들어왔으니,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던 것 같다. 환이가 전역할때만큼은 보조기를 뺐다.
11월
전역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지난 2년간 있었던 일들을 반추하며 잘 살아왔는지, 가장 기억나는 일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고생도 많이 했다. 그러나 고생은 다른 사람들 전체가 하고 있기 때문에, 그때의 고통은 반감되리라 믿었다. 전역날, 대대장님과 사진을 찍고 부대 코인?을 받은 뒤 간단한 소감을 발표했다. 평소 나는 선임들의 전역식을 보며 언제 나도 전역하나 하고 기다렸는데, 막상 이날이 다가오니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어버버 거렸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무사하게? 전역했다. 우리 입대 동기들은 4명이서 하양역 부근 국밥집에서 국밥 하나씩과 소주 한병을 시켜 두잔씩 나눠먹었다. 나는 술이 약해 두 잔만 먹어도 충분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집으로 갔다.
지금도 나는 내가 나온 부대가 자랑스럽다고 느끼고, 군 경험은 내 평생의 가치관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군 생활동안 만난 인연들로부터 항상 감사하다.






전역을 하고 군 동기들끼리 강릉으로 여행을 갔다. 1박 2일로 한번 여행을 갔는데, 그때 이후로 만나보지 못했다. 간간히 카톡으로 연락은 하지만 오프라인으로 만나는 것 만큼 의미있지는 않다. 다들 가끔 그립기는 한다.

12월
전역하고 11월, 12월은 아버지를 따라 현장에서 전기설비 보조 아르바이트를 했다. 12월 중순에는 의정이와 셋이서 한라산으로 떠났다. 한라산은 처음이었는데, 완만했지만 하루 날을 잡고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괜찮은 난이도였다. 의정이는 그때 한창 체력이 바닥을 찍을 때라 헉헉대며 올라갔다. 그래도 정상을 다들 봤다. 그때에도 제주도에는 동백꽃이 피어 있었다. 근처의 수목원에 갔는데 거기가 썩 마음에 들었다. 나는 자연경관, 꽃, 이런 것을이 좋다.


제주도는 박물관이 많은 것 같다. 무슨 밀랍인형 전시관도 갔었다. 연말에는 민규, 순범이랑 한자리를 가졌고, 의성이랑도 밥을 먹으러 태백을 다녔다. 일하지 않는 날에는 그림도 조금 그리면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또 드라마에 빠져 한창 상영중이던 미스터 선샤인도 집에서 봤다. 틈틈히 내년의 도전을 위해 재활 차원에서 홈트레이닝도 실시했다. 왼쪽 어께는 스트레칭하지 않으면 좀 뻑뻑했지만, 그래도 운동을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다년간의 습관성 탈골로 인해 몸이 많이 비틀어졌었지만, 그래도 운동을 꾸준히 해 나가면 자연스럽게 고정이 되겠거니 하고 생각하면서 운동을 했다. 아직 헬스장은 힘들고, 집에서 운동을 했다. 뭐니뭐니 해도 건강한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2018년의 한 해도 이렇게 저물어갔다.